배트맨 - 다크나이트

영화 | 2008/08/25 23:39 | Hannal
이 글에는 영화 내용이 거침없이 나오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미리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읽지 마시오. 그래도 읽어서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은 그대 탓이오.


“엄마, 애기는 어디서 나와? 난 어디서 나왔어?”

“다리 밑.”

훗날, 나는 그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난 단지 작은 요정이 날아와 반짝이는 씨앗 하나가 엄마 배에 닿아 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배트맨 비긴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히 예전 배트맨들과 다른 배트맨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배트맨인지는 몰랐다. 나중에 따로 비긴즈를 보고 나서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성인을 위한 동화, 성인을 위한 배트맨을 만들려 한다는 걸 이해했다.

비긴즈도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역시 배트맨이 주인공은 아니다. 악당(?) 우두머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재료 역할만 할 뿐이다. 심지어 주인공이고 재판관처럼 행동하면서 철학 조차 없다. 철학 부재로 시종 알프레드와 레이첼에게 찌질댄다. 2시간 30분 중 1시간은 징징대는데, 정말이지 한숨 나오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헤쳐나가는 스파이더맨과 참으로 비교된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다크나이트를 기꺼이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똥꼬에 털도 나고 공연한 하늘을 보며 씨발... 이라고 중얼거려 본 적 있는 성인이라도 눈물 날 것 같은 혼돈과 혼란의 시기를 한 번쯤은 겪게 된다. 스파이더맨이 3편에 오면서 은근슬쩍 애들 보다는 어른들이 공감하고 몰입하며 감상하게 된 것처럼, 돈 많은 놈의 돈지랄 영웅놀이였던 동화판(comics version) 배트맨이 아니라 옆집 몸짱 청년 느낌나는 성인 영화가 되었다. 뭐, 그렇다고 이 청년이 청년실업을 걱정할 것 같진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평하듯이 다크나이트에서 에이스 역할은 “조커”가 하고 있다. 배트맨은 조커의 순수성을 빛내주기 위한 어둠 덩어리 일 뿐이다. 그것도 정체성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방황하기에 정체성이 분명한 조커를 돋보이게 한다. 사실 조커는 프로이트 입장에서 봤을 때 자아(ego)나 초자아(super-ego)가 아니라 본능(id, 이드)를 충실히 행하는 개체이다. 그런데 배트맨은 어떠한가. 영웅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초자아를 보여주기는 커녕 자아 조차 흔들리기 일쑤이다.

이는 어쩌면 줏대없는 순수성이나 불완전성으로 인한 컴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트라우마는 이미 비긴즈에서 극복했다. 근데 트라우마 후유증으로 남은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끝판왕을 다 깨고 순수함과 순결함으로 똘똘 뭉친 조커를 대한 꼴이 아닐까. 하비(검사)를 부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지만 이는 새내기 후배를 보는 눈길일 뿐, 배트맨이 정말 부러워하는 인물은 조커였던 것 같다.

영상은 대체로 약간 칙칙한 색감을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매트릭스처럼 뻔뻔할 정도로 대놓고 디지털 색감을 쓰고 있진 않다. 과거 배트맨 영화들이 동화같은 비현실성이나 가상성을 보여줬기에 더욱 비교된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봉고(벤)차 등장 장면은 영화 히트를 연상케 할 정도로 현실 보다 쇠맛 나는 색감을 낸다. 그래서 시꺼먼 (합성)거죽 뒤집어 쓴 배트맨이 눈에 더 띄인다. 목소리도 걸걸하고 툭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성격도 지랄 맞으니,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을 다크 나이트(Dark knight)로 만들려고 작정했다고 할 수 있다.

조금 의아한 것은 조커의 움직임이다. 그는 분명 대단히 본능에 충실한 척 하지만, 실은 그의 행동들은 배트맨을 능가하게 계획을 짜고 움직이는 기획쟁이다. 정체성과 테러 성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 이야말로 튼튼한 제 등발 믿고 일단 부딪히고 보니, 대체 누가 이드(id)이고 누가 자아(ego)인지 헷갈린다. 그런데 그런 건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라.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느껴지는 느낌은 아무리 되뇌어도 배트맨은 발업 질럿이고(ego,post-ego) 조커는 풀업에 아드레날린 글렌즈까지 된 저글링(id) 느낌이긴 했으니까.

아쉬운 점은 하비 덴트이다. 그 매력 철철 넘치는 두 얼굴의 사나이를 혼자 찌질대다 떨어져 죽게 하다니. 2시간 30분 영화 상영 시간 중 30분 줄이고 하비 덴트를 다음 편에 등장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뭇내 아쉽다. 조커 매력은 철철 넘쳤지만 후반 30분은 좀 힘에 달린 인상이었기에 더욱 아쉽다. 투페이스가 되기 전인 검사일 때도 영화 이야기 진행에는 중요하긴 한데 인물성(character)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물성으로는 고든 형사보다 떨어진다. 브루스 웨인이 후원회를 연 뒤로는 인지도 잘 안된다. 레이첼이 죽은 후에야 각성하고 동전 튕기며 도박놀이를 하지만 도박은 패가망신이라는 교훈을 남긴 채 공사장에서 죽어 없어지니, 참으로 좋은 설정을 갖고 있는 인물을 쉽게 버린 아쉬움이 든다.

조커는 정말 최고였다. 이 영화는 이제는 죽고 없는 히스레저를 위해 바쳐진 영화라고 할 만하다. 찢어진 입으로 침이 마르는 탓인지 자꾸만 입을 쩝쩝거리며 주변 사람들은 물론 관객들까지도 설득시키고 압도하는 그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마치 3,000년 전 원래 조커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전설이 사람들 입을 타고 돌고 돌다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히스 레저는 조커를 완벽하게 부활시킨 것 같았다. 펭귄맨이나 투페이스 등 여러 인물이 있지만 배트맨의 경쟁자(rival) 중 최고는 역시 조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크 나이트가 분명 성인을 위한 배트맨 영화이긴 해도, 동화 요소가 완전히 걷힌 건 아니었다. 이게 아쉬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 좀 애매해서 여전히 갸우뚱하게 되는데, 배트맨이 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감을 잡고 마침표를 찍는 걸로는 좋은 요소였지만, 조커라는 멋진 설정과 이야기 흐름에 비추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썩 잘 어울리진 않았다. 그 동화 요소란 조커의 순수악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성향인가? 하는 확인과 시험 장면이다.

성인이라고 해도 조커가 바라던 폭파 장면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동화에서 벗어났다면 그에 맞는 연출을 바랐다. 오줌보 터지도록 2시간 넘게 영화를 길게 잡았을 것이라면, 배트맨이라는 이름을 떼고 다크나이트라는 이름만 쓸 것이라면 기꺼이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결국 다른 영웅 영화가 그러하듯이 동화 같은 성향을 완전히 걷어내지 않았다. 그 덕에 배트맨은 다음 편에 나올 때 그나마 어깨에 힘주고 나올 명분을 건졌지만, 그 때문에 조커는 계속 보여주던 치밀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며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난 여전히 이런 결말이 과연 좋은 것인지 불편한 것인지 헷갈린다.


사람 마다 평은 크게 다르지만, 난 참 즐겁게 봤다. 매트릭스를 보며 느끼던 감동에는 못미치지만, 사뭇 다른 맛깔스러움을 느꼈고 이제서야 배트맨 시리즈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런 감과 이야기거리를 계속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다음 편에 기대를 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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